
들어가는 말 — 미움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의 마음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에베소서 4:32)
살다 보면 잊기 어려운 상처를 받을 때가 있다.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하기도 하고, 가까운 사람에게 모욕적인 말을 듣기도 한다. 가족이나 친구 때문에 평생 가슴에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시간이 지나도 그 일을 생각하면 화가 난다.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 있지?”
상대방은 이미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는데 나는 그날의 일을 다시 떠올리고, 분노하고, 괴로워한다.
이때 한 가지 질문을 해볼 필요가 있다.
내가 미워하고 있는 동안 가장 힘든 사람은 누구인가?
미움은 상대방을 향하고 있지만 그 감정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다.
그래서 용서는 상대방만을 위한 일이 아니다.
용서는 상처에 묶여 있는 내 마음을 풀어주는 일이기도 하다.
1.사람은 왜 미움을 오래 간직할까
누군가에게 부당한 일을 당하면 화가 나는 것은 자연스럽다.
분노는 “나는 부당한 일을 당했다”는 것을 알려주는 감정이다. 때로는 자신을 보호하고 잘못된 상황에서 벗어나도록 행동하게 만든다.
문제는 사건이 끝난 뒤에도 마음속에서 그 일을 계속 되풀이할 때다.
상대방이 했던 말을 다시 생각한다.
그때 하지 못했던 말을 머릿속에서 되풀이한다.
“그때 내가 이렇게 말했어야 했는데.”
“언젠가는 반드시 대가를 치를 거야.”
그러는 동안 실제 사건은 과거에 있지만 내 마음속에서는 계속 현재의 사건으로 살아 있게 된다.
몸은 과거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지금 떠올리고 있는 생각과 감정에도 반응한다.
그래서 오래된 원망을 계속 되새기는 것은 마음에 적지 않은 부담이 될 수 있다.
2.미움을 되새기면 몸도 다시 긴장한다
상처받았던 일을 떠올려 보자.
가슴이 답답해지고 얼굴이 달아오르거나 어깨와 목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끼는 사람이 있다.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분노와 적대감은 몸의 스트레스 반응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성인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도 용서하는 마음이 커질수록 스트레스는 줄어들었고, 이러한 변화는 마음건강의 개선과도 연결되어 있었다.
중요한 것은 과거의 사건 자체만이 아니다.
그 사건을 오늘도 마음속에서 얼마나 붙잡고 살아가느냐도 현재의 마음 상태에 영향을 줄 수 있다.
미움은 상대방을 벌주기 위해 품고 있는 감정처럼 느껴지지만, 그 감정을 반복해서 경험하는 사람은 결국 나 자신이다.
3.용서란 잘못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다
용서라는 말을 들으면 거부감부터 느끼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이 나에게 한 일을 어떻게 용서하라는 말인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용서의 의미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용서는 잘못한 행동을 옳다고 인정하는 것이 아니다.
상처받은 사실을 없던 일로 만드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상대방과 반드시 다시 가까워져야 한다는 뜻도 아니다.
신뢰가 심하게 깨졌다면 관계에는 적절한 거리가 필요할 수 있다. 폭력이나 학대처럼 안전이 문제가 되는 상황에서는 무엇보다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 우선이다.
용서는 상대방이 한 행동에 대한 판단과 별개로, 그 사람 때문에 내 마음속에서 계속되는 미움과 복수심에 더 이상 끌려다니지 않겠다고 선택하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용서는 상대방의 행동보다 내 마음의 자유와 더 깊이 관련되어 있다.
4.용서는 한 번의 결심으로 끝나지 않을 수 있다
“용서했어.”
한마디 하면 모든 감정이 즉시 사라질까?
사람의 마음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머리로는 용서하기로 결정했는데 어느 날 그 사람을 다시 만나거나 당시의 일을 떠올리면 화가 치밀 수 있다.
그렇다고 용서에 실패한 것은 아니다.
최근 연구에서는 용서를 결정으로서의 용서(decisional forgiveness)와 감정의 변화까지 포함하는 정서적 용서(emotional forgiveness)로 구분하기도 한다.
먼저 “복수하지 않겠다. 미움에 끌려가지 않겠다”고 결정할 수 있다.
하지만 마음속의 분노와 상처가 가라앉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할 수 있다. 2025년 발표된 연구에서도 용서하기로 결심하는 것과 실제로 분노와 원망을 내려놓는 것 모두 마음의 평안과 대인관계에 긍정적인 관계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용서는 순간의 선언이라기보다 마음이 조금씩 자유로워지는 과정일 수 있다.
5.용서를 연습하면 마음은 어떻게 달라질까
용서는 한 번의 결심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의 미움과 원망을 조금씩 내려놓아 가는 과정이다.
여러 연구에서도 용서를 연습한 사람들은 분노와 적대감, 스트레스와 우울한 마음이 줄고 긍정적인 감정은 증가하는 변화를 보였다.
2024년 《BMJ Public Health》에 발표된 국제 공동연구에서는 콜롬비아·홍콩·인도네시아·남아프리카공화국·우크라이나의 성인 4,598명을 대상으로 스스로 실천할 수 있는 용서 프로그램의 효과를 조사했다.
참가자들은 자신에게 상처를 준 일을 돌아보고, 그 상처에 대한 감정을 살펴보며, 상대방을 용서하는 과정을 단계적으로 연습했다.
그 결과 2주 동안 용서를 실천한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이 줄었고 우울과 불안 증상도 개선되는 변화를 보였다.
상처받은 기억을 지울 수는 없다. 하지만 그 기억에 붙잡혀 계속 분노하며 살 것인지, 미움과 원망을 조금씩 내려놓을 것인지는 선택할 수 있다. 과거는 바꿀 수 없어도, 과거에 붙잡힌 마음은 자유로워질 수 있다.
용서는 단순히 상대방을 위한 도덕적 행동이 아니다. 상처와 미움에 붙잡힌 내 마음을 풀어주고 다시 평안을 찾아가는 마음의 훈련이 될 수 있다.
6.용서하는 마음은 몸에도 영향을 줄까
용서와 건강의 관계를 조사한 연구들도 있다.
17개국에서 이루어진 103개 독립 표본, 총 2만6천여 명의 자료를 종합한 연구에서는 용서와 전반적인 건강 사이에 관련성이 관찰됐다. 특히 신체건강보다 심리적 건강과의 관계가 더 강하게 나타났고, 심박수와 혈압 같은 심혈관 지표와의 관련성도 보고됐다.
또 다른 대규모 분석에서도 128개 연구, 5만8천여 명의 자료에서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과 신체건강 사이에 작은 긍정적 연관성이 확인됐다.
이러한 연구를 생활의 언어로 풀어보면 이해하기 쉽다.
오랫동안 분노와 원망을 되풀이하는 대신 마음의 긴장을 내려놓고, 스트레스에 대처하며, 다시 자신의 일상과 관계에 에너지를 사용하는 것이 건강한 삶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음의 짐을 내려놓으면 그만큼 오늘을 살아갈 힘도 되찾을 수 있다.
7.용서와 화해는 다르다
이 부분은 반드시 구분해야 한다.
용서는 내가 할 수 있지만 화해에는 상대방도 필요하다.
상대방이 잘못을 인정하고 관계를 회복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다시 건강한 관계를 만들어갈 수 있다.
그러므로 누군가를 용서했다고 해서 그 사람을 다시 믿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돈 문제로 반복해서 나를 속인 사람을 용서할 수는 있어도 다시 돈을 맡기지 않을 수 있다.
나를 계속 모욕하는 사람을 미워하지 않기로 결정하면서도 적절한 거리를 둘 수 있다.
용서에는 사랑이 필요하지만 관계에는 지혜도 필요하다.
용서는 경계를 없애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미움에서는 벗어나되 필요한 경계는 세울 수 있는 마음의 자유를 얻는 것이다.
8.용서는 상대방보다 나를 자유롭게 한다
용서하기 어려운 가장 큰 이유 가운데 하나는 이런 생각이다.
“내가 용서하면 저 사람이 이기는 것 아닌가?”
그러나 용서는 승패의 문제가 아니다.
상대방을 미워하면서 하루를 보내고, 잠자리에 누워서도 그 사람을 생각하고, 몇 년이 지나도 그때의 말을 떠올리며 화를 낸다면 그 사람은 이미 내 마음에서 너무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용서는 그 자리를 비워내는 과정이다.
“당신이 한 행동은 잘못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일 때문에 남은 인생까지 미움 속에서 살지는 않겠다.”
이렇게 마음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용서는 과거를 바꿀 수는 없지만 과거가 오늘의 나를 붙잡는 힘은 줄일 수 있다.
9.용서는 어떻게 시작할 수 있을까
처음부터 “완전히 용서해야 한다”고 자신을 몰아붙일 필요는 없다.
먼저 내가 무엇 때문에 상처받았는지 솔직하게 인정하자.
“나는 그 말 때문에 상처받았다.”
“나는 배신감을 느꼈다.”
“나는 아직 화가 난다.”
감정을 인정한 뒤에는 한 가지 질문을 해볼 수 있다.
“이 미움을 계속 품고 살아가는 것이 앞으로의 내 삶에 도움이 되는가?”
그리고 용서할 준비가 됐다면 작은 결정을 시작할 수 있다.
복수하려는 생각에서 한 걸음 물러나고, 그 사건을 계속 되새기는 시간을 줄이며, 내 삶에서 다시 중요한 것에 마음을 돌리는 것이다.
용서는 상대방을 위해 억지로 좋은 감정을 만들어내는 일이 아니다.
내 마음을 미움의 지배에서 조금씩 꺼내오는 연습이다.
10.신앙인에게 용서는 어떤 의미인가
기독교 신앙에서 용서는 매우 중요한 가르침이다.
그러나 실제 삶에서 용서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상처가 클수록 더욱 그렇다.
나는 용서가 인간의 의지만으로 언제나 쉽게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신앙인에게는 기도가 필요하다.
“하나님, 아직도 이 사람을 생각하면 화가 납니다.”
그 마음까지 솔직하게 하나님께 말씀드릴 수 있다.
그리고 조금씩 기도할 수 있다.
“이 미움에서 나를 자유롭게 해주십시오.”
용서는 잘못을 옳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 판단을 맡기고 나는 미움의 짐에서 벗어나겠다는 믿음의 선택이 될 수 있다.
상대방을 붙잡고 있던 손을 놓는 순간, 사실은 내 마음을 묶고 있던 끈도 함께 느슨해질 수 있다.
맺음말
살다 보면 용서하기 어려운 사람을 만날 수 있다.
그 상처를 없던 일로 만들 수는 없다.
그러나 과거의 상처가 오늘의 마음까지 계속 지배하도록 내버려 둘 필요도 없다.
미움은 상대방을 향하지만 그 미움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은 나다.
용서는 상대방에게 면죄부를 주는 일이 아니라 내 마음을 원망과 복수심에서 풀어주는 과정이다.
상처를 인정하자.
필요한 경계는 세우자.
그리고 준비가 되면 조금씩 미움을 내려놓자.
신앙인이라면 하나님께 내 상처와 분노를 솔직하게 내어놓고 용서할 힘을 구하자.
과거는 바꿀 수 없지만 과거를 안고 살아가는 내 마음의 방향은 바꿀 수 있다.
미움보다 평안을 선택하고, 원망보다 자유를 선택하는 연습을 하자.
그 작은 선택이 쌓이면서 마음은 가벼워지고, 마침내 용서할 줄 아는 건강한 마음습관으로 자라날 수 있다.
무병장수 건강 전도사 서웅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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